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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TB – iii

앨범 소개

애초에 멤버 하나하나의 화려한 이력이 화제가 되어 ‘홍대판 어벤져스’라 불리며 등장한 ABTB였으니 훌륭한 결과물을 기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바닥에선 1+1+1+1+1이 5라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소위 슈퍼 밴드라 불리는 이들의 결과물에 실망해오지 않았나. 미남 미녀들의 가장 예쁜 얼굴형, 눈, 코, 입이 합쳐졌을 때의 기괴함을 떠올려본다면, 밴드의 결과물은 개개인의 실력보다 그 조합이 만드는 시너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하며 꽤 훌륭한 조합임을 증명했던 ABTB는 이번 음반 제작에 앞서 보컬 박근홍의 탈퇴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다. 흔히 보컬을 프론트맨이라 칭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가장 먼저 보이고 들리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들어간 음악이라면 분명 목소리가 가장 많은 것을 보여주고 설명한다. 음악이 가진 인상과 무드를 가장 진하게 표현하기에, 밴드 음악을 얼굴에 빗댄다면 보컬은 눈과 입이라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곡마다 어울리는 눈과 입을 이식받기로 한 ABTB의 결정은 여러모로 대담해 보인다.

‘푸 파이터스와 레드 제플린의 결합’이라는 세간의 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하드록이라는 장르적 문법에 충실했던 1집, 프로그레시브 록을 듣는 듯한 새로운 시도들이 돋보인 잘 짜여진 컨셉 앨범이었던 2집에 비하면 이번 음반은 전반적으로 더 감각적이고 ‘Young’한 하드록을 들려준다. 박근홍이 만들어내는 까칠하면서도 무거운 무드 아래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봉인해왔던 리프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발랄하다. 기타 파트는 철저하게 두 기타리스트 황린과 곽상규의 재량에 맡겼다는 강대희(드럼)와 장혁조(베이스)의 말처럼 이번 음반에서 기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그러면서도 감각적으로 균형을 맞춰 치밀하게 짜여진 리프들은 과함이 없다. 강대희와 장혁조가 만드는 관록의 그루브는 더할 나위 없는 완급조절로 젊은 기타리스트들의 화려한 칼춤에 완성도를 더해준다.

1번 트랙 “BULLY”는 당혹스럽게도 기타리스트 곽상규의 기타가 아닌 랩으로 포문을 연다. 다른 멤버들이 한창 “BULLY”의 보컬에 대해 고민할 때 곽상규는 호기롭게 그 위에 랩을 녹음해서 보냈다고 한다. “내가 뭔 짓을 하던지” 상관 말라는 그의 거침없는 외침은 자연스럽게 새로 시작하는 ABTB의 출사표가 되었다.

이전 음반들이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데 집중했다면, 강대희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번 음반의 가사들은 좀 더 내밀한 감정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밴드가 한동안 느꼈을 상실감(잃어버린 하루와 잃어버린 얘기만큼),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혼란(어딘가 또 어딘가 찾고 있지), 그리고 허무함(이름 없는 성들이 의미 없이 무너질 뿐)과 이유 모를 원망(끝 모를 나의 분노, 끝 모를 나의 전쟁)을 전하는 조규현의 목소리엔 잔뜩 날이 서 있다.

배인혁 특유의 신경질적인 보컬로 표현되는 “똑같은 날들, 같은 말들”에 대한 권태와 짜증, 격해진 감정들을 뒤로하고 이별의 순간(상처 가득했던 달라진 얼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 날)을 진하게 전하는 이윤찬의 호소력 넘치는 보컬의 극명한 대비는 밴드가 거쳐왔을 감정의 풍랑을 꽤 극적으로 보여준다.

조규현이 조용히 읊조리며 길을 떠나는(작은 배를 한 척 조심스레 준비해 하나 남은 작은 내 몸을 싣고서) 순례자의 방관적인 태도를 애처롭게 그려낸 “SANTIAGO”를 지나 김바다의 목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Take Me To”에 도달하면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한발 물러나면 비로소 주변 보이기 시작한다(그 모든 것이 말을 걸어와, 할 얘기가 많았던 걸까, “SANTIAGO”). 그제야 “한없이 작아진 날 일으켜 세운” 고마운 존재들이 보이고, 힘든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다(이 빛 속에 나를 비추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극복은 시작된다(고통의 숲에 던져진 모든 미움이 떠오르네, 그 모든 게 멀어지네 지워지네). 아픔과 상처, 그리고 치유와 극복이라는 상반되는 테마가 김바다의 포효 아래 뒤섞인다. 고통스러움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극복을 위한 힘과 의지 또한 충만하다. 그리고 감추고 숨기기 보다는(패를 감춰 패를 속여 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로 한(가진 것을 모두 토해내버려) ABTB의 정공법을 직선적으로 표명하는 “BLUFFING”까지, 김바다는 ABTB의 강한 의지를 완벽하게 대변한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손색이 없다.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Gray Boy”는 박근홍의 블루스 프로젝트 오버드라이브 필로소피에 대한 ABTB의 대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끈적한 블루스를 보여준다. 마치 내가 만든 요리를 옛 애인이 맛있게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더 열심히 만들어 새 애인과 나눠 먹는 느낌. 황린과 곽상규는 블루스를 보란 듯이, 원 없이 뽐낸다. 앞서 무덤덤하게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이윤찬은 “Gray Boy”에서 감정의 발단과 절정을 오가며 ABTB식 블루스와 너무나도 훌륭한 호흡을 보여준다. 완성하지 못한 장면들에 대한 아쉬움(홀로 추는 춤은 끝나고, 못내 남길 말은 기억으로)이 이윤찬의 진한 목소리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양쪽 다 달갑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박근홍을 제하고는 ABTB의 새 음반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음반은 그의 탈퇴가 시작이었고, 그래서 가능했던 시도들이었다. 스타일이 다른 두 기타리스트의 화려한 칼춤을 필두로, 너무나도 훌륭한 보컬들이 ABTB가 만든 서사 안에서 저마다의 강한 존재감을 뽐내며 각 각의 노래와 깔맞춤을 이룬다. 앞서 말했던 ‘이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꽤 성공적인 수술이라 생각된다. 새로운 눈과 입이 이식된 얼굴들에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ABTB의 무드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다소 이질적일 수 있는 대목들이 눈에 띄지만, 이 부분은 앞으로 ABTB가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여러모로 듣는 재미가 있는 앨범이다. 성공적인 시도였기에 앞으로 ABTB가 만들어갈 새로운 얼굴이 더 예측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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